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서비스직 여성 건강
관리자
2008-01-04 17: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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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원하네요. 제가 원래 가슴에 담아두는 편인데, 오늘은 실컷 얘기를 했어요.”
백화점 화장품판매원으로 일하는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혼잣말하듯 말했다. 한 사람 인터뷰하는데 2시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게는 그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옮아온 것 같다. 우울하다. 이런, 마지막 질문을 빼먹었구나.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이 앞으로 유통서비스 분야의 여성노동자 건강을 지키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자를 놓으면 좋겠네요’, ‘서비스노동자를 존중하는 날 캠페인을 해서 사회의 의식을 바꾸면 좋겠어요’, ‘화장실? 눈치보지 않고 화장실 가는 것이 좋아요…’ 제 각각의 얘기들이었지만, 사람들을 만날수록 요구사항은 몇 가지로 압축됐다.
“그래요. 내년에는 백화점에 의자를 한 번 놓아보자구요. 조합원들도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함께 해주세요.”
지난 1년간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조사하고,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안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유통서비스 분야는 처음 접했지만, ‘여성노동자의 건강’이라는 주제로 연구해온 것은 10년이 되어간다.
2000년, 주72시간 먼지 속에서 일하는 미용노동자들
2000년에 미용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해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경인지역 평등노동조합에서 미용서비스 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인연이 닿았다. 처음 실시하는 조사다 보니, 다른 나라 상황을 찾아보게 되었다. 북유럽 자료를 많이 참고했는데, 그곳 미용노동자들은 근무시간이 평균 주당 32시간 정도였고, 하루에 대하는 손님이 5명 정도였다.
정부(노동부)의 감독이 미용실에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정부 지도에 따라 각종 보호구나 환기시설 등이 개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용노동자들 중 직업성 질병에 의해 미용노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자주 보고돼,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는 전체 미용노동자의 약 10 % 정도가 천식을 앓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한국의 미용노동자들은 얼마나 일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하루 12시간씩 주6일 근무하고 있었다. 주당 총 72시간 정도는 노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동부의 근로감독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며, 환기시설이 있으면 좋지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천식을 일으키는 블리치 파우더 먼지를 마시는 건 예사였다. 그렇다면 한국 미용사들이 천식을 앓는 비율은 20~30%에 이를까?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건강한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라는 것 때문이다. 한국에선 미용학원에 다니거나 미용노동자로 첫발을 내딛는 초기에, 이미 피부질환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탈락하는 숫자가 핀란드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고되고 유해한 미용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몸을 가진 건강한 노동자들만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미용서비스 업계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통계가 잡히지 않으면, 이 분야 노동자의 질병에 대한 자세한 통계 역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근골격계 질환 또한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핀란드에 비해 한국의 미용노동은 알러지에 강하고 튼튼한 무릎과 허리를 가진 노동자들에게만 열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적 감각이나 자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알러지 때문에 미용노동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이며, 이런 진입의 장벽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천식환자를 찾아내어 사회적으로 대책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조합은 아직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내부의 고민과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용노동자의 건강에 대해 조사는 하였으되, 그 결과는 발표하지 못했다. 조금 기다리면 노동조합과 함께 이 심각한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대응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그러던 것이 곧 10년이 된다.
2003년, 실적압박에 위장질환, 유산 겪는 학습지교사들
학습지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 2003년에 진행됐다. 당시 학습지시장에 비해 학습지회사가 너무 많이 생겨 과다경쟁이 발생했고, 그 경쟁의 최선두에 교사노동자들이 있었다. 교사노동자들이 영업을 뛰고 실적의 압박을 느끼다 보니 자기 돈으로 회비를 물면서까지 회원을 늘려 보고하는 일도 발생했다.
식사시간이 불규칙적이라 위장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한 집 끝내고 또 다른 집으로 정신 없이 뛰어가다 넘어져 다치는 일도 흔했다. 으슥한 골목을 무서워 떨며 돌아다니는 것도 다반사였고, 학생을 기다리다 학부모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유산은 왜 그리도 많은지...
당시에 정부측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서, 산재보험을 적용해 교사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고마운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건강과 안전문제는 산재보험이 없어서 발생된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 걸린 회원관리 실적판을 떼어내지 못하는 힘없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그나마 있던 노조의 활동이 위축되고, 집단적으로 부당함에 대항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에 발생된 문제였다.
건강문제는 총체적 결과였다. 스트레스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우울증 걸린 다음에 산재보험으로 우울증 약을 먹게 되는 것으로, 노동자들이 고마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조사보고서에 ‘노동자성 인정’이야말로 학습지 교사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할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노동자 건강문제에 있어서,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었다.
다행히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와 학습지노동조합과 함께 보고회를 가졌다. 노동자성 인정을 위해 함께 투쟁하자고 했다. 그런데 2007년 10월, 학습지노동자들에 대해서 산재보험을 적용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됐다. 보험료 전액을 사업주가 납부하는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게, 반은 노동자, 반은 사업주가 내는 방식이었다. 여전히 이들이 겪을 안전보건의 위험들은 감소하지 않은 채, 편법성 짙은 산재 적용만 이루어진 것이다.
2007년,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을 찾아가다
미용노동자와 학습지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어디에 무슨 일이 있다더라’ 하고 발표하는 것만으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느낀 바가 컸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괜찮은 일자리란 ‘안전한 일자리’라는 개념을 형성했다.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전도, 일자리의 질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조직하라(Organize)!!!"는 것이 안전보건의 구호였다. 미조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노조가 없어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한 슬로건이었다.
영국의 수퍼마켓에 서비스산별노조 안전보건 담당자의 사진과 연락처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가슴속에 꽈악 막혀있던 무엇인가를 정통으로 때린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미조직, 영세,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아직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2006년 말,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문제를 2007년 중요과제로 선정했다.
이는 주변상황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2006년 민주노총은 노동안전보건위원회를 만들어 노동자 건강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 해 동안 노동안전보건위원회 회의를 열어 금속노조, 화섬연맹, 공공연맹, 보건의료노조, 건설연맹과 만났다. 그런데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여성서비스노동자들, 영세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에서는 안전보건 담당자가 없어 회의에도 나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당사자의 힘으로 노동자 건강관련 활동을 펴기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안전보건위원회는 일단 서비스연맹을 중심으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문제부터 제대로 대응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전 조직적으로 미조직, 비정규, 영세, 여성, 이주노동자 조직들이 조합원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번 조사의 제목은 “유통서비스 노동자의 안전보건 의제개발”이다. 즉 2007년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과 관련한 조사는 ‘실태조사’가 아니라 ‘의제개발’을 위한 조사였다. 상황이 어떤지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상황이 바뀌겠느냐 하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조사였다.
어느 정도 조사가 진행되고, 서비스연맹 측에 산하조직 대표자들 상대로 보고회를 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반응이 좋아서, 서비스연맹은 임시대의원대회에서도 발표할 시간을 주었다. 전형적인 유통서비스 분야의 대의원들뿐 아니라 피자헛, 한진관광 등 다양한 분야의 서비스노동자들이 조사결과에 동의해주었다. 이제 서비스연맹은 유통서비스 분야의 여성노동자가 겪는 우울증, 피곤함, 하지정맥류, 무릎과 다리의 골병, 인격적 모독, 각종 스트레스, 가족이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문제, 다리가 부러져도 깁스를 풀고 일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8년, 당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를
이제 서비스연맹은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활동을 2008년 사업으로 배치를 해놓은 상태다. 이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연구자들을 더 조직했다. 사회학자, 산업의학 의사, 법률전문가 그리고 인간공학 전문가. 이들 중 인간공학 전문가를 빼고는 전원 여성연구자가 위촉됐다.
여성과 남성이 위험을 느끼는 감수성이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성이 많은 병원 사업장 같은 곳에서 조사해보면 폭력의 위험에 대해 남성보다 여성이 2배 높게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부딪치거나 끼여서 발생하는 사고도 여성이 더 높게 인식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다루는 만큼, 여성연구자들이 결합하는 것이 더 전문적이라고 판단했다.
서비스연맹과 연구자들은 내년 1월 초에 첫 회의를 갖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한해 서비스연맹의 건강권 핵심의제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떻게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알리며, 어떤 실천프로그램을 기획할 것인지 의논하게 될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 할인마트에 의자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복도 곳곳에 식수를 설치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산업안전보건법에 화장실 기준을 마련하도록 제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제부터 스스로의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차별을 당하며 인권침해를 겪는 당사자로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주눅 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