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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의 현장' 될 뻔한 KBS <체험 삶의 현장>

관리자 2007-04-03 11:31:25 조회수 4,955
'산업재해의 현장' 될 뻔한 KBS <체험 삶의 현장>
산업안전근로감독관 눈에 비친 '안전불감증' 제작 풍토

나는 KBS <체험 삶의 현장>을 즐겨본다. 힘든 노동 현장 체험을 통해 진정한 땀의 의미를 전한다는 기획의도가 좋기 때문이다. 12년 동안 667회를 방영했으니 의미와 흥미를 골고루 갖춘 프로그램임이 공인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난 3월 25일, 여느 때와 같이 그 프로그램을 흐뭇한 마음으로 시청하다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렸다. 가수와 프로그램 진행자로 유명한 김흥국씨가 상수도 보수 1일 노동자로 현장체험을 했는데 그 장면이 너무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그날 김씨는 산업재해로 황천객이 될 수도 있었다.

아무 조치 없이 맨홀에 집어넣다니

김씨의 당일 임무는 누수를 탐지해 해당 부위를 굴착하고 보수하는 것이었다. 삽과 괭이로 직접 땅을 파고 상수관 누수부를 찾아 메우고 되묻는 작업으로 상당히 힘들어보였다. 우리네 수도꼭지까지 깨끗한 물이 배달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 작업, 즉 맨홀뚜껑을 열고 하수도에 들어가 측벽에 상수관 누수 흔적이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하는 작업에서 발생했다.

맨홀작업을 포함한 밀폐 공간 작업은 최근 5년 동안 100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사망했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작업이다. 물론 맨홀작업 중에서도 하수관 관련 작업보다 정보통신 관련 업무로 작업하는 경우에 사고 위험이 더 높긴 하지만, 이날 프로그램에서 방송된 하수관 작업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장 관리감독자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는 듯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김씨를 맨홀 안으로 집어넣다시피 했다.

김씨가 오히려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호소하면서 질식할 것 같다고 하자(당시 "화장실 들어가는 것 같다"고 김씨가 말하는 내용이 자막으로 나왔다), 현장 관리감독자는 괜찮다고 말했다. 진작 내려가 있던 다른 한 사람은 밑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추운 날이었으니 망정이지, 따뜻한 날씨였다면

맨홀 내부의 공기상태는 아무리 하수관이 크다고 할지라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맨홀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맨홀 안의 산소 및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기준 농도 이상의 유해가스에 노출되면 경보음을 울리는 측정기를 노동자가 착용하고 작업해야 한다.

대부분의 관련 재해는 산소결핍이나 황화수소 중독에 의한 것인데, 문제를 인식하기도 전에 중추신경이 마비돼 혼절하기 때문에 대피하는 게 불가능하다. 쓰러진 동료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역시 생명을 잃는 사례가 많은 것은 그러한 단면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가스를 측정했어도 하수관 내 유해가스 위험에 확실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기호흡기를 지급, 착용하게 해야 한다. 공기호흡기란 작업자가 숨 쉴 공기를 등에 멘 뒤 이것으로 호흡할 수 있게 만든 호흡보호구의 일종이다.

김씨가 작업하던 날이 다행히 꽃샘추위로 눈까지 내리는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따뜻한 날이었다면 김씨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날씨가 따뜻하면 오수의 미생물이 활성화돼 유해가스는 더 많이 발생하고 상대적으로 산소농도는 낮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난히 따뜻했던 지난 2월 인천에서 하수관 작업을 하던 3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공기호흡기만 착용했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인재(人災)'였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에서도 맨홀 내부를 '밀폐공간'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 장소에서 노동자를 일하게 할 때 사용주에게는 안전보건교육 실시, 작업 시작 전 공기 측정, 노동자에게는 공기호흡기 및 송기마스크 등 보호구 착용 등을 의무화하고 있다.

당일 작업에서 수도사업본부 측은 이러한 의무 중 단 한 가지도 이행하지 않았고 노동자인 김씨의 적절한 문제제기조차 무시했다.

담당 PD "촬영당시 안전조치 미흡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날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내용은 산업보건에 관한 시행규칙 위반이다. 김씨는 소중한 현장 체험을 통해 땀의 의미를 전달하려다가 '산업재해'라는 불필요한 체험을 할 뻔 했던 셈이다.

2일,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KBS PD와 통화해 산업안전근로감독관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느낀 이러한 우려를 전했다. 담당 PD는 "프로그램을 촬영할 때 맨홀 안의 산소 및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지 않았으며, 미흡한 안전조치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올 여름 유난히 더위가 기승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밀폐 공간 질식재해의 발생가능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밀폐 공간 질식재해를 철저히 예방해, 그런 재해를 이제 더 이상 우리사회에서 체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울러 많은 시청자들이 보는 대표적인 공중파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이런 점을 더 유의해줬으면 한다.